전 주월남공사 이대용 장군의 월남패망증언 7-3
평화조약과 상호방위조약을 비웃은 하노이의 무력남침 총공세
<이대용장군은 6․25전쟁에 보병 중대장으로 참전하여 압록강까지 진격해서 수통에 물을 담기도 했다. 이후 최전선을 누비며 사선을 수없이 넘었다. 1975년 월남패망 당시엔 주재 공사로서 마지막 한 명의 교민까지 철수시킨 후 본인은 월맹군에게 억류되어 5년간 정치범 수용소 생활을 겪었다. 이 글은 이대용 장군이 지난 3월 8일 ‘선사연역사포럼’에서 강연한 원고다. 한국의 정치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절실한 심정이 93세 고령의 이대용 장군으로 하여금 156매에 달하는 육필원고를 작성하게 만들었다. ‘(사)선진사회만들기연대(선사연)’ 선사연역사포럼은 이 전쟁영웅이 전하는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의무감으로 이 글을 올린다.>
8. 북베트남의 3·10 남침 적화통일
(1) 남베트남의 안보불감증과 군(軍)전투력의 붕괴(崩壞)
1973년 1월 27일,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되자 남베트남국민들은 앞으로 남북전쟁은 절대로 없을 것이며, 남북통일은 국제평화감시위원단의 통제 감시 하에 남북자유총선거에 의해서 평화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파리평화협정 내용을 굳게 믿고 있었다. 특히 파리평화협정에는 소련 외무장관과 중공 외무장관이 서명하고 있기 때문이며, 북베트남은 군대의 무기와 탄약은 전적으로 소련과 중공에서 100% 공급받고 있기에 더욱 그렇게 방심하게 되었다.
또한, 북베트남이 만에 하나라도, 파리평화협정을 위반하고 남침을 감행한다면 강력한 국제적 제재는 물론이고, 미국과 남베트남이 맺은 상호방위조약에 의거해 즉각 미군이 북폭을 감행하여 하노이를 위시한 북베트남 주요도시들을 불바다로 만들며, 남베트남군을 지원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북베트남은 재남침은 못할 것 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 북베트남은 세계 최극빈국 중 하나로 미국이 제공해주겠다는 40억 달러의 원조가 꼭 필요하여 파리평화협정의 이행을 당연히 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1974년 10월에는 남베트남 내에서 유전(油田)이 발견되었으며 매장량은 약 200억 톤으로 추산되었다. 그래서 앞으로 통일 베트남은 경제적으로 풍요하고 모두 잘 살 수 있게 된다다는 희망을 갖게 되어 안보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고 경제개발에 주력하기로 했다. 남베트남은 경제개발을 위해 미국을 위시한 선진국으로 유학생을 많이 보내기로 하면서, 현역군인들마저도, 군적은 현역으로 둔 채, 사복을 입고 선진국 일반대학으로 유학을 가는 것이 관행화 되었으며, 이는 돈 없고 빽없는 절대 다수의 현역군인들의 사기(士氣)를 극도로 저하(低下) 시켰다.
또 한편 외국 유학갈만큼 돈은 없으나 그래도 어느 정도 돈 있는 집안의 현역군인들은 뇌물을 군(軍) 상관(上官)에게 바치고 장기 휴가를 비공식적으로 받아서, 집으로 돌아가서 일반 회사에 취직하여 사복을 입고 회사에 출퇴근 하고, 1년에 한번 있는 현역군인 각개점호(各個點呼)때 만 군복을 입고 소속부대에 가서 며칠간 근무하는 부정부패도 만연 하였다. 또한 높은 군 지휘관연락병 직책을 가지고 군에서는 근무하지 않고, 군 지휘관이 투자해서 운영하는 일반 기업체에 가서 군복을 입은 채 공짜로 일 해주는 현역군인들도 있었다. 이렇게 군복을 입고, 부대에서는 근무하지 않고, 일반 회사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을 국민들은 ‘꽃군인’이라고 호칭했다. 그리고 현역군인이지만, 사복을 입고 외국으로 간 대학생 또는 일반회사에서 “근무하는 현역군인 들은 ‘유령군인’이라고 호칭했다.
티우 대통령 사위도 사이공 대학생 이었다가 군대 현역 입대 후, 몇 개월 만에 미국 일반대학으로 유학을 가면서 ‘유령군인’이 되었다.
이 ‘꽃군인’과 ‘유령군인’의 수는 1975년 남베트남 패망 당시, 남베트남 현역군인 총인원수 58만 명 중, 약 10만 명에 달했다. 민간인 사회는 군 보다도 더 부정부패했었다.
오랫동안 내려온 4대악(뇌물, 도박, 아편, 매춘)은 날이 갈수록 더욱 더 기승을 부렸다.
(2)북베트남 정치국의 남침 결정
1974년 10월 북베트남 하노이에서는 정치국과 중앙당군사위원회 합동 비밀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레준(LE DUAN)서기장은 북베트남군이 남침총공세를 감행하면, 사기가 땅에 떨어진 남베트남군은 쉽게 패전(敗戰) 도주(逃走)할 것이며, 닉슨이 대통령직에서 사임한 미국은 국내사정도 그렇고, 남베트남 이라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어도 소용없다는 것을 지금은 알고 있기에 남베트남과 맺은 상호방위조약은 이행하지 않을 것 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1975년 1월 8일 북베트남정치국 회의에서는 북베트남군 18개 사단과 기타 전투부대를 북위 17도선 이남의 남베트남에 총 투입하여 남베트남을 무력으로 적화통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남침 총공세를 현지에서 총 지휘하기 위하여 북베트남 공산군 육군참모총장 반 띠엔 둥(VAN THIEN DUNG)대장은 1975년 2월 5일 오전 10시 30분 정각 하노이공항에서 AN-24기를 타고 17도선 바로 북방에 있는 동호이(DONG HOI)공항을 향해 이륙했다. 그는 동호이에서는 군용지프를 타고 호치민 도로를 따라 17도선을 넘어 2월 6일에는 중부베트남 고원지대의 전략요충지인 반메뚵 서쪽 밀림지대에서 짐을 풀었다. 그는 철저한 비밀 유지를 위해 ‘뚜인’ 이라는 익명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미 정보기능이 거덜 난 남베트남당국은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3) 북베트남군의 3·10 남침총공세 적화통일
1975년 3월 10일 새벽 2시 북베트남군 대병력이 중부베트남 고원지대에서 남침 총공세를 감행했다. 사기가 땅에 떨어진 국방의지가 허약한 남베트남군은 압도적인 수적(數的) 우세와 높은 사기를 가지고 공격해 오는 북베트남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각지에서 괴멸하며 패주(敗走)했다. 3월 26일에는 중부베트남 항구도시이며 남베트남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전략적 요충지대인 다낭(DANANG) 마저 함락되고 남베트남은 중부베트남을 모두 상실했다. 이로써 남베트남군 약 50%의 병력이 붕괴 해산됐다. 이 후 북베트남군 18개 사단이 사이공을 향해 무인지경(無人之境)을 달리듯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한편 허를 찔린 티우대통령은 “즉각 정치인들은 정쟁(政爭)을 중지하고 국민들은 일치단결하여 침략 북베트남공산군을 무찌르고 자유베트남을 지키자고 대국민호소를 했다. 티우 대통령의 간곡한 대국민호소가 발표되자, 짠 후탄 신부(神父)는 이렇게 대답했다.” 중부베트남의 고원지대에서 반민주, 부정부패를 일삼는 티우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그 곳에 북베트남군은 없다. 티우는 책임지고 사퇴하라“. 짠 후탄 신부는 미국과 맺은 방위공약을 철석같이 믿고 미군이 곧 개입할 것이며, 더 이상의 북베트남공산군의 공세는 불가능하며, 북베트남공산군은 부득이 철수할 것으로 판단했다. 따라서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해서 티우 대통령에게 타격을 주고 몇 개월 후에 실시될 대선(大選)에서 자기들이 미는 후보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이런 발언을 한 것이었다. 다른 야당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들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북베트남을 이용한다면서 티우를 격렬히 비난했다. 이 와중에 웬 까오끼 전(前) 부통령은 티우 대통령 제거를 위한 쿠테타를 계획했으나, 내부분열로 실패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티우 대통령은 국제평화감시위원단에게 ‘북베트남공산군의 북위 17도선 이북으로 철수’를 미국에게는 방위공약 이행을 촉구했다. 그러나 이들 중 어느 것 하나 이행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유령군인’ 과 ‘꽃군인’들은 가족과 함께 배와 항공기로 남베트남을 탈출하고 있었다. 4월 21일 티우 대통령은 하야(下野)하고 정 반민 예비역대장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1975년 4월 29일 북베트남공산군 14개 사단이 사이공을 포위했다.
4월 30일 정오 북베트남공산군 제 2사단은 사이공 시내로 진격하여 탱크부대가 남베트남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있는 독립궁을 점령했다. 정 반민 남베트남 대통령은 포로가 됐고, 이로써 수적(數的)으로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북베트남을 압도한다고 자랑하던 남베트남은 북베트남 공산군에 의해 너무도 허무하게 패망(敗亡)하여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미국은 밑빠진 독 에는 물을 붓지 않았다. 1975년 남베트남은 밑 빠진 독과 같은 실태를 보이고 있어, 미국은 남베트남과 맺은 방위 공약을 이행하지 않았고 남베트남의 패망을 방관만 하고 있었다.
(이 글은 이대용 장군이 지난 3월 8일 선사연역사포럼에서 강연한 원고 "베트남 공산화통일이 한반도에 주는 시사점"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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