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전 주월남공사의 월남패망증언 7-4
이대용 공사가 겪은 정치범 수용소의 인권유린 참상
<이대용 장군은 6․25전쟁에 보병 중대장으로 참전하여 압록강까지 진격해서 수통에 물을 담기도 했다. 이후 최전선을 누비며 사선을 수없이 넘었다. 1975년 월남패망 당시엔 주재 공사로서 마지막 한 명의 교민까지 철수시킨 후 본인은 월맹군에게 억류되어 5년간 정치범 수용소 생활을 겪었다. 이 글은 이대용 장군이 지난 3월 8일 ‘선사연역사포럼’에서 강연한 원고다. 한국의 정치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절실한 심정이 93세 고령의 이대용 장군으로 하여금 156매에 달하는 육필원고를 작성하게 만들었다. ‘(사)선진사회만들기연대(선사연)’ 선사연역사포럼은 이 전쟁영웅이 전하는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의무감으로 이 글을 올린다.>
9. 베트남 적화통일 후 인권 말살의 12년 세월
(1) 정치범 수용소 암흑시대
캄보디아가 적화통일된 것은 베트남의 적화통일보다도 13일 전인 1975년 4월 17일 이었다. 캄보디아 공산군은 적화통일 직후 총 인구 7백만 명의 3분의 1인 약 2백여만 명을 학살했다. 구(舊) 정권(우익정권)의 군인, 공무원 들이 대학살을 당하고, 정치인, 기업인, 그 외의 반동분자들이 시체로 변했다 그리고 이들의 가족들도 학살당했다. 남베트남에서도 그러한 학살이 발생하는 것을 크게 우려한 UN 사무총장은 북베트남 공산수뇌부에게 ‘남베트남에서도 캄보디아에서와 같은 대학살이 일어나면, 베트남의 UN회원국 가입은 불가능하다’는 긴급 메시지를 보냈다. 북베트남은 UN회원국 가입신청을 이미 내었으며 UN회원국 가입을 갈망하고 있는 중이었다.
1975년 5월 1일 밤 12시 북베트남정권은 라디오방송을 통해 중대 성명을 발표했다. ‘이제부터는 남베트남 내에서 인민학살을 일체 금지시킨다.’는 내용이었다. 그 후속조치로 그 대신 구(舊) 남베트남의 군인, 공무원을 하루라도 한 사람, 정치인, 종교단체 지도자들은 몇 주간(週間)의 정치·재교육(再敎育)을 받기 위해 전원(全員) 신고 등록을 하라고 남베트남전역에 공고했다. 신고 등록한 사람들은 당국의 지시대로 몇 주간 정치 재교육을 받기 위해 당국의 지시대로 공책, 연필, 침구, 일용품을 가지고 당국이 지정한 장소로 갔다. 부두에서는 선박에, 역에서는 기차에, 학교운동장에서는 트럭에 실려 야간 통금시간에 재교육소로 극비리에 수송되었다. 재교육소에 도착한 신고등록자들은 깜짝 놀랐다. 교육훈련소가 아니라 범죄자들을 수용하는 형무소였다. 수감기간도 몇 주간이 아니라 무한정이었다. 공산당국은 신고 등록한 정치범들의 일부가족들도 추가로 체포하여 형무소에 투옥하기 시작했다. 전 남베트남 수상을 지낸 환 휘꽡(PHAN HUY QUAT)의 늙은 부인과 아들, 딸, 사위, 며느리 그리고 3세~5세의 어린 손자, 외손자 할 것 없이 모조리 체포해 사이공 치화형무소에 수감했다. 그 외에 수많은 여성과 어린이들도 체포되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종교계에도 투옥의 바람은 불고 있었다. 티우 대통령 타도에 앞장섰던 유명한 안꽝사(印光寺)의 띡 찌꽝스님, 카톨릭의 저명한 짠 후탄신부, 호 앙뀐신부, 웬 반록 신부도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사이공 치화형무소 E동에 수감되어 있는 카톨릭 신부의 수만도 30여명 이었다.
남베트남 모든 형무소는 소위 반역 반동분자들을 콩나물처럼 빽빽이 수용했으나, 홍수같이 쏟아져 들어오는 수감자들을 모두 수감하기에는 시설이 엄청나게 부족했다. 그래서 구(舊) 남베트남군 막사들이 임시 정치범 수용소로 전용되고, 수감자들이 북베트남으로 많이 이감되어 갔다. 자유베트남(남베트남) 치하에서 자유를 부르짖으면서 촛불시위 등의 데모를 주도했던 정치인들과 대학생들에 대해서도 체포, 수감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었다.
수감자들의 옥중생활은 비참했다. 수감자 1인당 한 끼의 식사는 돌이 우적거리는 한국 밥공기로 3분의 2정도이고 부식은 늙은 호박 소금국 반(半)공기가 고작이었다. 그 적은 양(量)에다가 하루에 두 끼만 주고 한 끼는 굶겼다. 일광욕도 금지시켜 298일 만에 햇볕을 한번 쬐는 수감자도 있었다.
치화형무소에 수감된 한국인 중에서 가장 많이 매를 맞은 사람은 이상관(李相官)이었다. 그는 간수로부터 자전거 체인으로 세차게 연속 얻어맞으면서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다. 어떤 고약한 간수는 수감자를 형무소 철장에 대(大)자를 거꾸로 한 형태로 매달았다. 거꾸로 매달린 수감자는 비명을 지르다가 살려달라고 엉엉 울었다. 30분쯤 지나면 조용해진다. 기절한 것이다. 그래도 간수는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가 한참 만에 풀어준다. 다시 깨어나면 다행이고 숨이 끊어져도 문제는 없다. 시체를 내다 묻어도 되고, 유가족에게 인계해도 된다. 유가족은 아무 말 없이 머리 숙여 받아야지 딴 말을 하다가는 그 역시 체포 수감된다. 이렇게 인권유린을 당해도 호소할 곳이 없었다.
총살현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수감자들도 있었고, 학대와 영양실조로 병들어 죽어서 시체가 되어 옥문을 나서는 수감자들도 있었다. 전(前) 캄보디아 수상을 지난 손 녹탄, 남베트남 전(前) 수상 환 휘꽡, 전(前) 부수상 짠 반뛰엔, 전 귀순성장관 호 반참, 그리고 유명한 카톨릭신부 호 앙뀐 등도 시체가 되어 옥문을 나섰다. 이 외에 수많은 수감자들의 시체가 쓸쓸하게 옥문을 나섰다.
이런 절망의 땅인 남베트남을 탈출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야밤중에 바다를 향해서 뗀목을 엮은 것을 타고 모험길에 올랐다. 이 보트피플의 연인원(延人員) 수는 약 106만 명이며, 이중 약 11만 명이 이런저런 일로 해서 남지나해의 물귀신이 되고, 살아서 외국 선박에 구조되어 해외로 망명한 인원수는 약 95만 명으로 집계 되었다.
이렇게 인권말살의 지옥세월이 12년간 처절하게 흘러갔다. 그러나 모든 것이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다. 1986년 10월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주 베트남 소련대사에게 소련의 개방정책을 베트남에서도 시행할 수 있도록 베트남 공산당 젊은 개혁파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오는 1986년 12월에 있을 제 6차 베트남 공산당전당대회에서 젊은 혁신파 인사가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에 당선되도록 전력을 기울이라는 극비명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제 6차 베트남공산당 전당대회에서 70대의 고령인사들은 현(現)서기장 레준을 위시하여 선거에서 모두 낙선하고, 활기에 넘치는 젊은층 지도자 웬 반린(NGUYEN VAN LINH)이 새로 베트남공산당 서기장에 당선되었다. 웬 반린 서기장은 소련의 고르바초프측과 긴밀한 협조하에 대담한 도이모이(刷新) 정책을 채택하여 베트남 헌법(憲法)을 개정하고, 그때까지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구(舊) 남베트남 군인들, 구 남베트남 공무원들, 구 남베트남 정치인들, 종교인들 등등을 전원 석방했다. 이때부터 베트남은 대혁신을 감행하여, 서방 민주주의 정책을 많이 채택하면서 대변신을 이루었다.
(2)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베트콩)의 사멸(死滅)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시내 및 교외에 진격한 북베트남공산군은 제2, 3, 5, 7, 8, 9사단 등의 6개 사단과 3개 독립보병연대이며,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군(소위 베트콩)은 한 명도 없었다. 북베트남 정치국 서열 6번인 홤 흥(PHAM HUNG)과 북베트남 육군참모총장인 반 띠엔둥 대장이 당일 사이공에 들어왔다.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 주석(主席) 웬 후또(NGUYEN HUU THO·阮友壽)는 2주일 늦게 5월 13일 그의 각료 12명과 보좌관 약 40명을 인솔하고 사이공에 들어왔다. 웬 후또는 공산당원이 아니면서 인민혁명당을 이끌고 있었다.
1975년 5월 15일 사이공시 독립궁 앞 통녁가(統一街)에서 전승축하분열행진이 있었다. 민간인 대열은 남베트남 임시정부 국기를 높이 들고 행진했으나, 군의 행진은 모두 북베트남 공산군 뿐이었다.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베트콩)의 법무장관인 쭝 뉴탄은 북베트남 육군참모총장 반 띠엔둥 대장에게 물었다. “우리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의 군대는 왜 보이지 않소?” 반 띠엔둥 대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남북의 군대는 이미 통합 되었오.” 쭝 뉴탄 법무장관은 깜짝 놀라며,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언제 어떻게 통합되었다는 것이요?” 하고 물었으나, 반 띠엔둥 대장은 묵묵부답, 그 이상은 설명하지 않았다. 군대가 한 명도 없는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는 이름만 남은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남베트남의 통치는 사이공에 파견되어있는 북베트남 정치국 서열 6번인 홤 흥 이 맡게 되었다.
1975년 11월 15일 밤, 웬 후또 주석은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의 각료 전원을 사이공시 중심가의 렉스호텔로 초청하여 만찬회를 가졌다. 북베트남 공산당 정치국원 홤 흥 및 그의 보좌관들도 초청했으나, 북베트남 공산당 간부는 한 명도 참석하지 않고, 웬 후또의 초청을 무시해 버렸다. 쓸쓸하게 최후의 만찬을 끝낸 후,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는 북베트남 정치국의 지시대로 쥐도 새도 모르게 해체되어 사멸(死滅)했다. 이 날부터 베트남 남북통일을 정식으로 내외에 공식 선언하는 1976년 6월 24일까지의 7개월 같은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웬 후또의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가 계속 남베트남을 통치하고 있는 양 위장하고 있었다.
그 후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 출신으로 공무원직에 남아 있는 자들은 부단히 숙청되고 있었으며, 결정적이고 대규모 숙청이 단행된 것은 1979년 1월 25일부터 2월 5일까지 이루어진 숙청이었다. 이 때 사이공 치화형무소에 근무하고 있던 옛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 출신장교(위관급 간수)의 약 70%가 숙청되어 쫓겨나가 하루아침에 알거지 신세가 되고, 그들이 숙청된 빈자리에는, 북베트남 측 현역군인들이 차지했다.
(이 글은 이대용 장군이 지난 3월 8일 선사연역사포럼에서 강연한 원고 "베트남 공산화통일이 한반도에 주는 시사점"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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