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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愚草斷想 22-68회, 官谷池와 烏竹軒
  • 작성자 : 문회목
  • 작성일 : 2023.08.05
  • 조회수 : 206


<愚草斷想 22-68회, 官谷池와 烏竹軒

愚草 文會穆

全筆家

22. 7. 25(월)

남녀 재산균등배분

分財記

지난 주, 연꽃 및 동창부부의 문인화 전시를 보려 시흥 관곡지로 나들이 갔다. 먼저 문인화 전시장에 가니 조촐하지만 수준 높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놀랐다. 동창의 대나무 작품에 화제가 없어, 대 잎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쉴새 없이 나다닌다는 淸風不盡을 화제로 제안한다. 중단하지 말고 꾸준히 좋은 작품을 만들라는 기원이다.

(시흥 연꽃밭)

시흥 연꽃밭

수십 여년전 놀러 온 적이 있었는데, 대규모의 연꽃밭으로 넓어지고 다양한 연꽃이 여러 가지 동화적 상상을 자극한다. ​동창이 노랑어리연 홍연 백연 수연 전당홍 까시연 부레옥잠 타일리아 물양귀비 가래 물칸나 파피루스 라고 수생식물의 이름을 열심히 알려 준다. 예나 지금이나 편의시설이나 주차장 시설이 없는 데도 연꽃 축제를 연다니 용감하다. 담대한 계획이 필요하다.

官谷池

연꽃밭 옆에 姜希孟 선생과 관련이 있는 官谷池와 權蔓衡의 고택이 있다. 官谷池는 농학자인 강희맹 선생이 1463년(세조 9년) 명나라에 다녀와 중국 남경에 있는 錢塘池에서 錢塘紅이라는 연꽃품종을 들여와 처음으로 심은 곳으로 알려진다. 관곡지 가의 고택은 강희맹의 사위인 權蔓衡(안동 김씨)의 집으로 권만형의 후손이 대대로 관리 되어오고 있다.

관람객이나 일반인은 관심이 없겠지만 안내판 및 자료에서도 알 수 없는 의문점이 있다. 官谷池와 古宅은 누구의 소유였는가이다. 두 곳 다 강희맹의 소유였는지, 두 곳 다 사위의 소유였는지, 관곡지는 강희맹의 소유, 고택은 사위의 소유였는지, 두 곳 다 강희맹의 소유였다면, 사위에게 재산을 물려 준 것이 된다. 사실이라면 당시 재산을 남녀구분 없이 상속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 넓은 땅을 소유 했을 것이 분명한데, 권만형의 후손들은 사당 코 앞까지 땅을 내준 것을 후회해야 하지 않을까.

烏竹軒은 李 栗谷의 재산이 아니다

부모 재산을 자식들에게 분배한 내용을 기록한 옛 문서를 分財記라 한다. 분재기는 상속·분배의 시점이나 방법, 관청의 개입 여부 등에 따라 여러 형식, 이름으로 나눠진다. 대략적으로 요약하면, 부모 등 재산의 주인이 생전에 자식들에게 직접 분배한 분재기에는 分給文記, 許與文記, 깃부文記 등이 있다. 재산 주인이 축하·사례 등을 위해 특별 상속한 別給文記 등도 있다. 부모가 타계한 뒤 자식들이 유산을 나눠가지며 작성한 문서로는 ‘和會文記’ 등이 있다.

* 깃부문기는 분급문기와 같이 財主의 생전에 작성되는 분재문서이지만 구별되는 것은 형제자매의 분급내용을 같은 문서에 표시하지 않고 자녀 각각의 몫을 따로 작성하여주는 문서이다.

신사임당의 어머니 龍仁李氏는 아버지 생원 李思溫과 어머니 崔氏 사이에 태어난 無男獨女로 남편 申命和 보다는 네 살 아래이다. 생전에 다섯 명의 딸들에게 재산을 분배하기 위해 分給文記를 작성하였다. 이를 <李氏分財記>라 한다

분배내용이 먼저 나오고 재산주인인 용인이씨를 비롯한 다섯 명의 서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사위인 張仁友, 둘째 사위인 李元秀, 셋째 사위인 洪浩, 넷째 사위인 權和, 다섯째 사위인 李冑南에게 토지와 노비를 분배해 주는 내용이 차례로 실려 있다. 끝부분에는 둘째 외손 율곡 李珥에게 제사를 맡는 奉祀條로, 넷째 외손 權處均에게는 묘지를 관리하는 拜墓條로 전답과 기와집 한 동을 별도로 지급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烏竹軒의 烏竹)

이때 신사임당의 어머니 용인이씨가 烏竹軒을 율곡이 아닌 권처균에게 물려주었는데, 이후 장자상속제가 정착되면서 오죽헌 고택은 줄곧 안동 권씨의 소유였다. 烏竹軒은 까마귀처럼 검은 대나무가 집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서 집을 물려받은 권처균이 자신의 호로 삼았다고 한다.

조선시대 하면 흔히 장자상속제를 생각하겠지만, 통념과는 달리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16세기 이전까지 남녀 차별이 적었다. 재산도 아들딸 구별 없이 공평분배했고, 제사도 돌아가며 지내기도 했다. 신사임당과 이율곡의 시대까지도 남녀 차별하지 않고 균등하게 상속하는 풍습이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씨분재기 외에도 여러 분재기가 남아 있다. 조선시대 중기만 해도 여성에게 그렇게 꽉 막혀 있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오늘날 부자들은 재산증식을 위해, 재산분할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세상은 가만히 있지 않다. 어느 쪽으로든 변한다. 나눠줄 재산이 없으니 다행인가.

연꽃 구경으로 시작하여 分財記까지 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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